내가 사는 피부

PUBLISHED 2015. 6. 28. 14:02
POSTED IN 영화


내가 사는 피부

페드로 알모도바르

2011















복수의 향연.


복수라는 단어가 주는 심상은

통쾌, 또는 허무.


통쾌한 복수는,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된다.

피해의 대상이 인간이기보다는 가해 '행위' 그 자체이다.

복수를 통해 피해자는 회복하며,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


허무한 복수는,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로 변하면서 스스로 파멸한다.

자신이 분열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학적이고, 비윤리적인 폭력이 주는 중독성에 이성이 마비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러한 복수에는 폭력이 남긴 카타르시스 뒤에 따라오는 허무함이

필연적이다.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가 지닌 속성이 그렇다.

파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된다. 모든 파괴가 그렇다.


복수의 주체가 피해자의 아버지, 그리고 의사라는 점이 <세븐 데이즈>와 유사하다.

<테이큰>처럼 만능 아빠를 두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복수도 먼 나라 이야기가 되는 세상.

자력구제가 판칠 수밖에 없는 사회 시스템. 법의 심판이 피해자의 억울함을 해소해주지 못하는 양형제도의 불합리함.

그렇기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가 등장한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복수'는 구약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한 시점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일 뿐, 

정의로운 사회가 온다면 이런 영화가 사라질까? 아니다.


피해자의 복수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복수의 대가 또한 피해자의 몫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티에리 종케 <독거미> 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