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쿠르디

PUBLISHED 2015. 9. 13. 15:47
POSTED IN 斷想

기억할게.


마돈나

PUBLISHED 2015. 8. 30. 21:37
POSTED IN 영화

마돈나

2015

신수원














제목의 역설.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 주변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주목을 받는 사람들 주변에는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자신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삶마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루하루를 묵묵히 감내하며 사는 것 외에는, 달리 

특별히, 더 주목받기 위해 사는 법을 모르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한 번쯤, 한 번 정도는 돌아보자.


돈으로, 사회적 지위로, 물리적 힘으로

그들의 삶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자본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기에.

마돈나가 사는 세상이 스크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딛고 있는 이 곳이기에.





차이나타운

PUBLISHED 2015. 8. 30. 14:11
POSTED IN 영화


차이나타운

2015

한준희















잡탕밥이 왔는데 죽순만 있고 해물은 빠진 느낌.

이 얼마나 허전한가.

이 얼마나 황당한가.


액션은 지루하고

대사는 비루하다.


제일 잘 하는 것 하나만 해라.

자장면 하나만 잘 해도 그 중국집은 욕 안 먹는다.




목함지뢰

PUBLISHED 2015. 8. 22. 10:31
POSTED IN 街談巷說

모든 걸 묻어버렸다.


경제사범 사면

국정원 민간인 사찰

국정원 해킹 실무자 의문의 죽음

사법 정의 타락 - 한명숙 대법원 유죄

친일 청산

박근혜의 사라진 7시간


이제는 쓰지 않는 70년대 지뢰 세 발이

무능력하고 부패하고 거짓뿐인 정권이

여전히 독재정권 때나 하던 작태를

정보를 통제할 수 없는 시퍼런 백주대낮에

분단의 아픔과 휴전의 긴장감이 도사린

이 한반도를

마음껏 유린하고 있다.



세대갈등

PUBLISHED 2015. 7. 19. 11:14
POSTED IN 斷想

부모 자식 간의 갈등.


아흔 먹은 아버지와 예순 먹은 아들 사이에도 갈등은 있다지만

지금 대한민국에는

이명박근혜 정권을 창출시킨 부모 세대와

이로 인해 결혼, 취업, 출산을 포기한 자식 세대의 갈등,

세대(이념)갈등이 피어오르고 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뒷짐 지고 웃는 건

새누리당과 자본가들.

새누리당 정권이 하는 짓은 국민을 이간질시키는 짓 말고는 하는 게 없구나.


부모 세대는 자식 세대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식 세대는 부모 세대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것이

세대갈등을 해결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집권 여당과 정부에 대해 쓴소리, 비판, 견제를 서슴없이 하는 것,

국민의식을 서로 고취하는 것.


모든 갈등의 해결은 대화로부터.


Da Capo

PUBLISHED 2015. 7. 1. 15:29
POSTED IN 斷想

다른 삶을 살아 봐야겠어.


그 삶은


세상을 향하고

사람을 향하는 


조금은 의미 있고

조금은 감동적인


그런 삶.





너무

PUBLISHED 2015. 6. 28. 16:46
POSTED IN 男&女

그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너무 자상해."


그녀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너무 착해."


누군가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너무'는

칭찬이 아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내가 사는 피부

PUBLISHED 2015. 6. 28. 14:02
POSTED IN 영화


내가 사는 피부

페드로 알모도바르

2011















복수의 향연.


복수라는 단어가 주는 심상은

통쾌, 또는 허무.


통쾌한 복수는,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된다.

피해의 대상이 인간이기보다는 가해 '행위' 그 자체이다.

복수를 통해 피해자는 회복하며,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


허무한 복수는,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로 변하면서 스스로 파멸한다.

자신이 분열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학적이고, 비윤리적인 폭력이 주는 중독성에 이성이 마비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러한 복수에는 폭력이 남긴 카타르시스 뒤에 따라오는 허무함이

필연적이다.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가 지닌 속성이 그렇다.

파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된다. 모든 파괴가 그렇다.


복수의 주체가 피해자의 아버지, 그리고 의사라는 점이 <세븐 데이즈>와 유사하다.

<테이큰>처럼 만능 아빠를 두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복수도 먼 나라 이야기가 되는 세상.

자력구제가 판칠 수밖에 없는 사회 시스템. 법의 심판이 피해자의 억울함을 해소해주지 못하는 양형제도의 불합리함.

그렇기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가 등장한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복수'는 구약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한 시점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일 뿐, 

정의로운 사회가 온다면 이런 영화가 사라질까? 아니다.


피해자의 복수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복수의 대가 또한 피해자의 몫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티에리 종케 <독거미> 원작


타임 투 킬

PUBLISHED 2015. 6. 28. 13:13
POSTED IN 영화


타임 투 킬

조엘 슈마허

1996















아동 성폭행 시리즈인가.

최근 포스팅이 공교롭게 겹친다.


개봉 당시 초반 법정 총질 장면이 이슈가 되었던,

그 장면이 마케팅으로 이용되어 각인된 영화.


<세븐 데이즈>와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비슷한 것은 자력구제이지만,

다른 점은 법정 스릴러라는 이야기 요소가 <타임 투 킬>에 가미된다.

나아가 흑백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문제까지 보여준다.


이 영화의 백미는 초반 아버지의 분노가 폭발한 법정 장면이 아니다.

변호인의 마지막 변론, 강한 울림을 준다.


존 그리샴 원작.



세븐 데이즈

PUBLISHED 2015. 6. 28. 12:47
POSTED IN 영화


세븐 데이즈

대니얼 그로우

2010















이런 류의 영화는 둘로 나뉜다.

보고 나서 통쾌하거나

보고 나서 찜찜하거나.


감정의 선이 갈리는 분기점은 

평소 아동 성폭행에 대한 문제의식의 유무이다.

'아동'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다.

(약자에 대한) 폭력에 불편함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면 충분하다.


자력구제에 대한 대리만족.

법의 시스템을 악용하는 가해자의 인면수심에 대해

법적 심판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을 피해자 스스로가 해결한다.

우리는 그 과정을 보면서 통쾌하거나 또는 불편하거나.


그 감정선은 '선택'이 아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감독의 '연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잔인한 장면의 연출은 이러한 장르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보는이에 따라서 그 정도는 다르게 판단된다.

그 다른 정도가 감정의 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연출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미미한 정도라는 점이다.


피해자가 집행자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

또 다른 가해자로 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

피해자가 괴물로 변하는 것을 방치한 사회 시스템에 고민해 보는 정도로

이런 류의 영화에서 의미를 찾으면 그만이다.


피해자를 나무라지마라.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다.